에브루헨 아모치온의 눈앞에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아메 서머터지, 아이트, 인간, 기쁨, 슬픔, 즐거움, 마족, 사명. 두서없이 나열된 잡다한 단어들은 모두 정갈한 천계어로 쓰여 있었다. 반복되는 작업이 지루하다는 듯 펜을 제 손에서 가볍게 내려놓은 그는 제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고, 글씨가 쓰인 종이를 조용히 가져간 아메 서머터지는 천천히 그 속에 쌓인 내용을 훑었다.


“에브루헨. 너 우리에게 사명을 내리신 여신의 존함은 알고 있어요?”

쓰여 있지 않은 내용의 존재 여부를 별다른 의미 없이 확인하려는 듯 질문을 던졌던 아메 서머터지는 즉시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조금 다급해진 기색으로 종이에서 눈을 돌렸다. 그의 눈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에브루헨 아모치온의 표정은,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엷게 풀어져 있었다. 한참의 정적 후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킨 그는 고개를 몇 번 젓다가 난처한 기색이 담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달리 기억나는 것이 없다는 양.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를 위한 신의 축복¿



에브루헨 아모치온의 기억은 이따금 제자리를 떠나고 되돌아오기를 거듭했다. 기억은 불규칙적으로 토막토막 잘려나가거나 아예 사라지곤 했으며, 어떤 것이 사라지는지는 때에 따라 달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것이 돌연 지워지거나 덧씌워지는 감각 탓에 그는 종종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아메 서머터지는 이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가 마족의 공격을 받아 그가 정신을 잃었던 순간부터라고 어렴풋하게 추측했다.


몇 개의 핵심적인 단어가 쓰이지 않은 종이를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짙은 날숨을 내쉰 아메 서머터지는, 펜을 들어 여백에 몇 개의 단어를 더 써 내린 뒤 그것을 다시 에브루헨 아모치온에게 내밀었다. 일단 여기 있는 것들만이라도 기억해 두는 편이 좋을 거예요.


“마음대로 될 것 같지는 않지만…노력해 볼게요.”

돌려받은 종이 속의 활자를 읽기 시작하는 그를 희미한 걱정이 서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메 서머터지는 신전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 직선형 복도의 끝자락에서, 그는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양 고개를 뒤편으로 돌렸다.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기 전까지는 신전 밖으로 나가지 말아요, 에브루헨.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제자리를 지키던 형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희미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고, 그는 인영(人影)의 움직임이 서서히 줄어드는 동안 그 언저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저 걸음을 옮겼다.


*


평소 깨어나던 시간을 한참 넘긴 후에도 에브루헨 아모치온은 제 방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방의 너머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인기척도 달리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할 일을 마친 뒤 여느 때와는 다르게 활기가 없는 듯한 그의 방 앞에 서 있던 아메 서머터지는 제 손을 살짝 구부려 방 근처의 벽을 세 번, 약하게 두드린 뒤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시야에 익숙한 형체가 들어오자 무어라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 했으나 한 발 먼저 튀어나온 에브루헨 아모치온의 목소리에 살짝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그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건가요? 띄엄띄엄, 안개처럼 희끄무레한 질문을 꺼내었던 그는 허구의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대사를 제 음성으로 옮겼다. …당신은 누군가요.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네 이름이나, 사명은?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겠어요?”

답지 않게, 다소 빠른 속도의 말을 허공에 쏟아낸 아메 서머터지는 동요한 듯 보였다. 그것은 평소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생각했던 존재가 순간의 붕괴로 비틀릴지도 모른다는 가설의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듯했다. 그는 제 숨을 한 번 길게 내쉰 뒤 말마디 몇 개를 더 입 밖으로 내었고, 정말 내 이름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렸나요, 라는 마지막 질문을 끝끝내 삼켰다.


귓전에 닿는 질문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제 몸을 웅크리던 에브루헨 아모치온은 갑작스러운 두통에 제 머리를 움켰다.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는 아메 서머터지가 저에게 했던 말들을 몇 번씩, 혼잣말처럼 작은 속삭임으로 되새겼다. 그 사이사이에는 기억의 파편으로 보이는 온갖 단어가 뒤섞여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부려 세운 양 무릎 사이로 제 고개를 깊게 묻어가던 그는 한참 후에야 돌연 고개를 들어 제 눈앞에 비친 풍경을 쳐다보았다.


“너는 아메...가 맞죠? 모든 기억이 돌아온 것 같아요. 하나도 빠짐 없이. 적어도 지금은-”

그가 자신의 기억이 정상적임을 확인하려 조심스럽게 꺼낸 말을 긍정하려는 양 아메 서머터지가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그의 동요는 사라지지 않은 듯싶었다. 여전히 진정되지 않아 가쁜 호흡소리가 탁한 기류를 채워갔다. 날숨처럼 툭툭 끊어지는 목소리가 그의 혀끝을 맴돌았다. 아메, 나 무서워요. 아무렇지도 않게 너를, 나를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요. 부자연스러울 만큼 빠르게 그의 뺨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에 햇빛이 섞여 부서졌다.


아메 서머터지는 불안하게 몸을 떨다가 파고들 듯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에브루헨 아모치온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 그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는 미묘한 도취와 서늘함이 감돌고 있었다.


괜찮아요, 잊지 않을 수 있을 거에요. 내가 곁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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