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뱀과 아지랑이의 이야기.



그렇게 도망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몇 겹의 수면을 넘어 마지막으로 도달한 최하층의 세계에 몸을 뉘인 채 푸념 비슷한 것을 중얼거리던 쿠로하는 쪼그려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던 모모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디선가 들어오는 빛에 의해 부서지는 물빛과 탁한 포말로 가득한 세계는 폐막식이 끝나고 제 할 일을 마친 무대처럼 사무치도록 조용했다.


“분명 단단히 마가 끼었던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나를 자의로 떠났을 리가 없잖냐.”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요… 당당하고 뻔뻔하게 자신이 했을 만한 행동을 단정지어 보이는 쿠로하의 말에 일순 턱 막혔던 숨을 천천히 내쉰 모모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것이 있는 양 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딴죽을 여느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 삼킨 뒤 몸을 한 번 굴려 바닥에 엎드린 쿠로하는 한참 동안 손끝으로 물장난을 했다. 형태를 짐작할 수 없는, 비틀어진 감정에 깊이 찔리기라도 한 듯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상처가 덧나는 감각이 쓰라리기 그지없었다. 찰방찰방 소리를 내며 물의 파편이 튀어 오르는 것을 바라보던 아지랑이는 그의 행동 중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공허하고도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과 모습을 표면에 뒤집어쓴 허상-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을 바라보던 쿠로하는 전조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의 모습과는 미묘하게 다른 눈빛과 표정, 기색을 띠고 있는 아지랑이를 무언가의 다른 호칭으로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머릿속에 그렸으나 이내 그것을 지워내었다. 생각의 받침이 될 수 있을 만한, 그런 마땅한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굳이 온정과 흔적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일 행동을 자초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를 사랑했잖아. 쿠로하가 몇 분 전에 생명이 다해 허공으로 사라졌던 대화의 끄트머리를 되살려 꺼낸 말에, 모모는 슬픔과 당혹이 뒤섞인 듯한 시선을 정처 없이 굴리다 수평선 너머로 흘렸다. 누군가가 곧장 눈물을 떨구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불안정함이 대기에 녹아 들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텅 빈 하늘은 더 이상 쓸모가 사라진 시간의 변화를 끝까지 나타내려 안간힘을 쓰는 양 거듭 총천연색으로 변해갔다. 은은한 쪽빛을 머금은 하늘을 올려보던 쿠로하는 순간 제 속-든 것은 없었지만-을 온통 비워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등장할 순간을 잘못 잡은 헛구역질은 예정보다 한 발 늦게 그의 목구멍 너머로 올라왔다.


토악질 대신 기침 몇 번을 입 밖으로 내던 쿠로하는 속이 가라앉은 뒤로 줄곧 움직임 없이 제자리를 지켰다. 황망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다. 그의 등에 제 등을 기댄 채 자세를 고쳐 앉은 모모는 얇고 긴 숨을 내뱉었다. 묵직한 기류가 사방을 잠식하고 있었다.


“결국 당신은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남겨지게 되어야만 했던 거에요.”

별이 뜨지 않는 싱거운 허공을 응시하며 모모가 꺼낸 말을 듣고 비릿한 미소-분명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을-를 입가에 띄워 보인 쿠로하의 대꾸는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던 것을 놓아버린 사람의 그것처럼 싸늘했다. 소원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정작 자신의 소원은 이루지 못한다는 내용의 뻔한 결말이지. 나도 알아. 제 귓전을 흐르는 그의 말소리를 들으며 발치의 물을 헤집던 모모는 세계의 중심부를 떠돌고 있던 무언가가 제 손에 잡힌 감각이 들자마자 그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낚아진 것은 아직 뜯어지지 않은 음료 캔이었다. 미적지근한 세계에 어울리는 미적지근한 결과, 라고 그녀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모모는 손에 들린 캔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톱으로 그것의 손잡이를 꺾어 열었다. 맑은 소리가 침묵의 사이사이로 퍼진 후 사라졌다. 탄산 특유의 향과 감촉이 캔 밖으로 빠져나갔다. 줄곧 물 속에 잠겨 있던 음료는 냉기를 잃다 못해 뜨거웠고, 그것이 혀에 닿자마자 그녀의 미간은 찌푸려졌다.


*


“…이제 무엇이 가장 두렵나요?”

“잊혀지는 것.”

모모는 그의 짧은 대답을 한참 곱씹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한다는 반응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캔을 원래 있던 자리-물 속-로 던져 넣은 뒤, 수면 위에 양 손바닥을 댄 채 그것의 아래쪽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 속에 발을 담갔다. 그녀의 태도는 발끝을 시작으로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한 자신의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했다. 물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고, 쿠로하는 침잠하는 파편의 모습이 거슬려 눈살을 찌푸렸다.


네 모든 죽음의 곁에는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만, 이제는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아지랑이는 끝까지 세계의 허상에게 푸념을 늘어놓는 쿠로하의 모습에 넌더리가 났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다리가 전부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일단, 다음 번-다음이 있다면, 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에는 사람 흉내를 좀 더 잘 내봐요. 아무나 죽이지 말되, 그 성격만은 어떻게 좀 죽이고. 그러는 편이 나을 걸요? 왜냐하면-“

사실은 사랑하고 있잖아요. 약간의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며 말을 끝마친 아지랑이는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려는 양 몸을 뒤로 기울였다. 웃기고 있네. 속으로 온갖 짜증을 늘어놓던 쿠로하는 대기가 한참을 일렁이다 사라진 장소를 빤히 응시했다. 두 번 다시 수면에 파문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는 어째서인지 목이 쉴 정도로 길게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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