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 침대 위에 반쯤 몸을 걸친 채 의미 없는 목소리를 허공으로 끊임없이 내뱉고 있는 키사라기 신타로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분명 그것일 터였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방의 온갖 장소에는 텅 빈 콜라 병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고, 그것들 중 하나를 손으로 집어 어중간한 온도를 손바닥으로 느끼던 쿠로하는 침대의 다리에 등을 기대며 간결한 숨을 내뱉었다. 너, 오늘이 며칠인 줄은 아냐? 8월 15일. 자신이 토해내듯 꺼낸 질문에 바로 대답을 단 신타로의 다리 근처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쏘아보던 그는 건조한 눈 위를 옷소매로 문질렀다. 감은 눈꺼풀 너머에서 안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리는 듯했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께서, 왜 밖에 안 나가고 계십니까.”

빈정거리며 제 입을 연 쿠로하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팔짱을 끼었다. 약처럼 씁쓸한 공기가 쉴 틈 없이 폐 속으로 몰려드는 감각은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몰라, 죽이던가. 그는 침대의 바깥으로 빠져나가 있던 두 다리를 허공에 차올리듯 거칠게 휘저으며 떼를 쓰듯 몸을 돌린 신타로의 날 선 대답에 응대하듯 꽤나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르고, 아무런 효율도 없을 것 같으니까 안 돼. 허공에 휘두르던 다리의 방향을 바꾸어 쿠로하를 한 대 치려다가 이내 그것을 단념한-별로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신타로는 속으로 이제는 아주 별 걸 다 따지는구나, 라는 푸념을 되뇌었다.


정적 속에서 한참 동안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몸을 앞뒤로 기울이던 쿠로하는 윙윙거리는 소음을 내며 줄곧 켜져 있던 컴퓨터가 퍽 거슬린 것이었는지 그 가까이로 다가가 본체의 전원 버튼을 마치 벌레를 죽일 때와 비슷한 모양새로 꾹 눌렀다. 희미한 효과음의 단말마와 함께 사그라진 기계의 자취에 몸을 일으켜 그에게 무어라 잔소리 같은 것을 쏘아붙이려던 신타로는 움직일 기력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 흐느적거리며 순간 몸에 들어갔던 힘을 풀었다.


신타로가 누운 채로 꾸벅꾸벅 졸다가 현실과 몽상의 경계에 접어들기 직전 가히 비현실적이라 칭할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제 양 손뼉을 친 쿠로하는 발치에 모아 두었던 빈 콜라 병들을 거칠게 쳐 내었다. 갑작스럽게 들려 왔던 큰 소리에 몸을 떨며 눈을 떴던 신타로는 꽤나 어설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의 모순적인 1인 앙케트. 내가 편하게 너를 먼저 죽일까, 아니면 게을러 터진 네 몸뚱이를 밖으로 끌고 나가서 끝까지 실시간 중계를 해 줄까.”

‘실시간 중계’라는 마지막 단어에 제 미간을 꿈틀하고 찌푸렸던 신타로는 말에 대한 반응을 내보이지 않은 채 재차 저의 몸을 한 번 굴려 근처의 너덜너덜한 만화책의 근처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곁눈질로 바라본 쿠로하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하고 싸늘했다. 도통 진의를 파악할 수 없는 감정기복의 진풍경이 돌연 눈앞에 펼쳐졌다고, 그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여전히 악취미네. 진심으로 묻지만, 인간이냐?”

물론 아니지. 순서가 뒤바뀌어 쌓여 있던 책 더미 속에서 가장 처음의 이야기를 담은 책 한 권을 집어 든 신타로의 중얼거림에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그야말로 박수가 아깝지 않을 명연기였다- 대꾸한 쿠로하는 뜯겨져 있던 과자봉지 속의 감자 칩 몇 개를 입에 넣으며 씹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선택권도 없잖아, 죽이던가. 밀가루가 엉겨 붙어 바싹 마른 목 근처를 문지르는 그를 살짝 흘겨보았던 신타로는 자신이 꺼낸 말의 마지막 마디를 특히 강조함과 동시에 한 손으로 책을 들고 돌아 누웠다.


자신의 주변에서 아직 개봉되지 않은 콜라 병을 찾으려던 쿠로하는 금방 그것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두꺼운 솜의 사이사이에 끼어 있던 공기들이 일제히 빠져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매트리스가 일순 파도처럼 울렁였다. 머릿속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멀미를 애써 가라앉히며 고개를 돌린 신타로는 무엇인가 좋은 일이라도 생긴 양 저를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는 쿠로하의 표정을 가증스럽다는 기색이 담긴 시선으로 응시했다. 또 뭐가 문제야, 미친 새끼야.


“아니, 딱히 문제랄 건 없고…그냥 휘둘리는 꼴이 아주 웃겨 죽을 것 같아서. 네가, 나한테!”

어디선가 들어온 빛을 머금은 것이었는지, 물기 어린 투명함으로 반짝이는 쿠로하의 눈동자를 텅 빈 감정으로 뜯어보던 신타로는 그의 말이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 말하는 대신 짙은 한숨만을 내쉬었다. 천천히 만면에 올라 있던 웃음기를 지우고 제 눈앞에 들어오는 검은 풍경들을 빤히 바라보던 쿠로하는 모로 누워 있던 그의 상반신을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돌연 목에 닿은 차가운 손의 감촉에 흠칫, 제 어깨를 움츠렸던 신타로는 낮은 숨소리에 가까운 쿠로하의 냉소에 일순 멈추고 있던 숨을 느릿하게 내쉬었다. 벽에 세게 부딪힌 뒤통수가 욱신거렸다.


“그래, 모처럼이니까 조금 더 유쾌하게 가는 것도 좋겠지.”

사람의 흉내를 내며 깊은 숨을 들이켠 쿠로하는 자신의 혼잣말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는 듯, 보드라운 살덩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