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소재 有.



타카미네 미도리는 뻑뻑한 제 눈을 몇 번 깜박여 보았다. 마치 지우개로 한 번 지워진 듯한 백색으로 채워진 사방의 풍경에 의아함을 느꼈던 그는 속으로 꽤나 진부하게 여긴 어디일까, 라는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차마 자신이 누구냐는 것까지는 자문하지 않았다. 고개를 틀어 재차 주변을 둘러보다가 흰빛이었던 사방이 점차 뒤틀리는 것에 이유 모를 압박감을 느끼던 그의 시야는 점차 렌즈의 초점이 맞추어지듯 선명해지는 학원의 풍경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어중간한 감촉을 띤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닿은 혀끝이 알싸하게 마르는 감각에 목 근처를 문지르던 미도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려다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아, 역시 우울해.


인기척이 없어 이상하게도 조용한 교내를 거닐던 미도리의 걸음은 문득 낡은 물이 고인 분수대 앞에서 멈추었다. 꿈 속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으나 금방 깨어날 것 같은 느낌은 아무래도 들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려던 그는 문득 시선에 밟힌 외진 모퉁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늘진 곳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잊어버린 것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윽.”

확실하게 누군가와 부딪혔다는 감각과 동시에 뒤로 넘어진 미도리는 머리 근처에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한 얼얼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하군! 혹시 다친 곳은 없는가? 부딪힌 사람이 꺼낸 듯했던 말은 그의 뇌리에 거의 근접하기 직전 흐릿하게 바래었고, 바닥 근처에서 날아오르기 시작했던 흙먼지는 막 투명한 허공으로 자리를 옮겨 나풀거리는 듯했다.


텅 비어있는 줄로만 알았던 교내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 것도 잠시, 일렁이던 귓전에 들려온 목소리가 지극히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는 생각에 미도리는 짧은 탄식을 입 밖으로 내었다. 모리사와 선배?


*


미도리는 반도 채 비워지지 않은 캔을 아슬아슬하게 손에 쥔 채 가만히 하늘을 응시했다. 이따금씩 움직이던 치아키의 손끝이 희미한 그의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고, 눈꺼풀을 닫을 때마다 몇 초 전까지 응시하고 있던 구름의 잔상들은 뿌옇게 점멸해갔다. 그는 입 속에 머금은 탄산음료를 삼킨 후 줄곧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이상하네요, 오늘은.


“음?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타카미네.”

미도리는 냉기가 어린 캔에 재차 입을 대다가 정면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자신을 응시하기 시작한 치아키의 질문에 아주 잠시 뜸을 들인 후 말문을 열었고,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치아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조금 진지한 분위기의-을 지어 보였다. 그야 …여기에는 저랑 선배 둘뿐이잖아요.


미도리가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벤치에 고쳐 앉았을 때 치아키는 무언가 응어리가 남은 듯한 표정으로 그의 짙은 눈을 빤히 주시했고, 이상한 것은 오히려 자신의 쪽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분위기에 탁한 한숨을 쉰 미도리는 선배야말로, 뭔가 다른 것 투성이면서. 라는 말을 꺼내려다가 그것을 삼켰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다시 고개를 돌린 후 먼저 몸을 일으킨 치아키는 저 혼자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난히 빠른 듯 느껴지는 그의 속도를 적당하게 따라잡으며 걷던 미도리는 그가 걸음을 멈추자마자 저도 길 한복판에 멈추어 섰다.


“역시 오늘의 타카미네는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이구나!”

아, 그런가요. 갑작스럽게 등을 돌린 치아키가 꺼낸 말에 돌연 김이 빠졌다는 듯 건성인 대답을 했던 미도리는 엷게 날이 선 눈으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이유도 대충 알 것 같으니, 문제 될 건 없겠지. 문득 혼잣말처럼 작은 소리로 들려온 말의 파편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는 잡음이 섞여 있었다.


옥상의 기류는 변함 없이 비현실적이었다. 난간에 기댄 채 방금 전 조금 남긴 채로 버리고 온 캔 같은 것들에 대한 자잘한 잡념을 떠올리던 미도리는 제 옆에서 실눈으로 바람을 피하고 있는 치아키를 조심스레 곁눈질했다. 타카미네는, 돌아가고 싶은 건가? 그가 꺼낸 모호한 느낌의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한참 침묵을 지키던 미도리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희미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하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무거움이 느껴지는 치아키의 마지막 말마디를 입 밖으로 내어 보던 미도리는 순간적으로 난간에 기대어 있던 몸이 들리는 듯한 감각에 비린 호흡을 멈추었다. 이질적으로 갈라지는 공기의 감촉이 느껴졌고, 뒤이어 찾아온 이명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귀를 막으려 했지만 그 어느 쪽 손도 누군가에게 붙잡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난간을 양 손으로 붙잡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치아키의 입이 달싹이는 듯 보였지만, 목소리는 끝끝내 들리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꿈이 아닐 리가 없잖아.





한참 고여 있던 숨을 토해내듯 쉬며 감겨 있던 눈을 뜬 미도리는 시야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제 앞머리와 이마 새를 손으로 비집어 몇 번 헤집었다. 눈가의 물기와, 찌꺼기가 남은 듯 개운치 않은 몸의 감각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던 그는 무의식적으로 창문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을 열었다. 미동 없이 한자리에 멈추어 있던 그의 손은 인적이 보이지 않는 조용한 바깥의 모습에 커튼을 잡고 있던 힘을 황급히 풀었다. 창가의 빛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미도리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실소를 한 번 내뱉은 후로부터 방의 공기는 급진적으로 가라앉기 시작한 듯했다. ...조용한 아침이 다시 익숙해질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있어주면 안 되었던 거냐고요. 숨을 간간이 끊어가며 혼잣말을 꺼낸 그는 다시 커튼을 젖히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우울하다고, 죽고 싶다고 여느 때처럼 말해 봐도 대답해 줄 사람이 없을 것을 재차 확신하며, 미도리는 희뿌연 허무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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