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22995386



가장 난해한 수식의 시작점은 언제나 너였어. 왜 여태껏 눈치 채지 못한 걸까.


비어 있던 허공을 채웠던 말은 너무도 가늘었기에 곧 사라졌고, 그 독백을 듣지도, 곱씹지도 못한 채 흘려 보낸 토우코는 그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유리창 너머의 풍경만을 바라보았다. 아래에서 위로 몰아치는 바람의 흔적이 이따금씩 근처로 날아들었다. 구름 사이를 드나들며 매 순간 각도를 바꾸던 햇살은 그날따라 유난히 선연하게 개어 있었다. 무슨 말을, 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녀는 사방을 메운 정적을 풀어낼 수 있을 법한 말들을 속에서 거듭 쓰고 지웠다. 침묵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의 감각을 제 눈앞에서 돌연 자아낸 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토우코는 바깥의 풍경을 주시하고 있던 시선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희고 검은 옷자락과 그것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수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흰 팔, 손목과 손. 그녀의 뇌리를 스친 것은 첫눈 같다, 라는 막연하고도 갑작스러운 감상이었다. 그녀는 별다른 의미 없이 허공을 스치고 제자리에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이의 손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멍하니 그 움직임만을 좇았다. 시간의 속도는 유난히 굼떴다.


입 밖으로 내고 싶은 말이 점점 불어난 탓에 도리어 입을 다물고 있던 토우코는 조금씩 제 시선을 위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허공에서 반대편 것과 마주쳤다 느낀 순간 N이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난 탓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 어깨 위에 닿은 타인의 감촉에는 온기가 배어 있었다.


그래, 알 것 같아. 너는 사랑, 그 자체였던 거야.


…너무 갑작스럽잖아. 저에게 던져진 결론에, 짧은 반응 하나를 시작으로 무어라 대꾸를 하려던 토우코는 빤히 내려다보이는 거리에서 반짝이고 있는 N의 눈동자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맑기 그지없어 오히려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그 눈길이 퍽 난처하여 어색한 표정만을 지었다. 그녀가 제 뺨에 오른 열기를 식히려는 양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다가, 문득 이 순간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바란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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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키타 GUGU」 AU




재차 한 번의 계절이 지나, 부쩍 싸늘해진 기류를 등진 채 토우코는 제 손가락을 차례로 꼽아가며 수를 세었다.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자연의 언저리에서 주변의 온갖 풍경과 사람이 바뀌기를 여러 번. 세월은 눈치 채지 못한 새에 먼 길을 떠나 있었다. 수가 예순을 겨우 넘길 때까지 셈을 이어가던 그녀는 거듭 한숨을 쉬다 심드렁한 기색으로 반쯤 풀어져 있던 주먹을 폈다.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감촉이 기묘하게도 낯설었다. 풀잎 흔들리는 소리만이 가득하던 담홍색의 하늘 위를 배회하며, 까마귀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숲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만 했다.





N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미적지근한 바람과 함께 겨울이 물러가기를 마흔 번쯤 반복했던 해부터였다. 저를 데리고 온 세상을 돌아다닐 것만 같던 그의 발걸음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점차 느려졌고, 그것이 끝내 멈추어 좀처럼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을 토우코는 늘 의아하게 생각했다.


짙은 그늘이 진 나무의 밑동에 앉아 고요하게 잠이 든 N을 가만히 지켜보던 토우코는, 그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려 제 엄지와 중지로 만든 고리에 대어 보았다. 예전보다 더 얇아진 듯싶었다. 밝은 하늘에 희미하게 떠 있던 달의 형체는 어느새 선명해져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곁에 자리하고 있던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린 것이었는지, N은 나른하게 눈을 떴다. …좋은 저녁이네, 토우코.


노을도 져버렸으니, 밤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걸.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한 대답에 그저 웃어 보인 N을 물기 어린 시선으로 한참 주시하던 토우코는 제 고개를 아래로 살짝 비틀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N, 예전이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야위었어. 백 년은 한참 전에 끝났는데 왜 나를 먹지 않아?


천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토우코가 꺼낸 마지막 말에, N은 환희와 절망, 아쉬움 같은 감정이 한데 뒤섞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사무치도록 슬퍼 보였기에, 그녀는 다시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하늘 너머로 눈동자를 굴렸다.


“언제부터였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어. 백 년이 지나 너를 먹으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라고…너희가 말하는 ‘정’이라는 게 심장 근처에 꽉 들어찬 것 같아서, 너를 잃는 것도, 시간이 가는 것도 두려워진 거야.”


그렇다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건 이상해. 먼 옛날에는 다른 사람들을 먹으면서 살아 왔다고 했잖아. 토우코의 목소리는, 허공으로 빠져 나온 말이 끝을 향할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그녀의 기색을 가만히 살피던 N은,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전, 그녀가 날 선 눈초리로 저를 적대시했던 기억을 떠올려 소성(笑聲)을 내었다. 그냥, 온 세상에 전부 네가 있어서. 도저히 먹을 기분이 나지 않았어. 돌연 그가 낸 말에, 토우코는 도통 의미를 모르겠다는 양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여태까지 네가 나에게 보여줬던 감정이나 웃음, 발걸음, 태도나 말...그것들의 파편을 모든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든 갖고 있었어. 세상 모든 것이 토우코를 닮아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진 거야.”


“…N은 사람이 죽는 순간에 하는 마지막 말이나 그 목소리를 먹는다고 했지. 궁금하지 않아? 백 년을 채운 인간의 맛은 산해진미가 따로 없을 정도라고, 직접 그렇게 말했잖아.”


"고작 맛에 대한 호기심 따위로 내가 어떻게 토우코를, 그 목소리를 먹을 수 있겠어.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너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허기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도 오래 전부터였어, 정말이야."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미세한 두통 탓에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머리칼 사이를 조금씩 헤집던 N은, 재차 희미한 숨을 쉬다가 깊은 수마 너머로 빠져갔다. 벌판에 남은 것이라고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래서는, 정말 인간보다 더 인간 같게 되어버리잖아. 막 허공으로 나오려던 마지막 말을 혀끝에서 도로 삼킨 토우코는, 미동조차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마찬가지로 함께 있고 싶은 나는 무엇을 하면 좋으냐고 물으려던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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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불명의 날조 다수




굳게 감겨 어두워진 시야 너머로 문득, 느껴진 익숙한 뒤척거림 탓에 깊은 잠으로부터 뭍을 향해 끌어올려진 토우코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었다. 굳게 닫힌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밝아질 기색이 없는 흑색이었다. 먼발치에서 가벼운 빗소리가 들렸다. 깨어진 수면의 흔적은 눈가 언저리의 뻑뻑한 감각으로서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토우코는 잠에서 깨어날 때와 같이 느린 속도로 몸을 일으켰고, 파리해진 안색의N과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 너머에서 투명하게 너울거리는 동요를, 적당한 슬픔과 이성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잔잔한 목소리로 제 앞에 존재하는 이의 이름을 불렀다. 누군가의 무의식 너머에서 일어난 감정의 변화가 자아낸 기류는, 당연하다는 양 실내를 눅눅하게 적시고 있었다.


너는, 제대로 여기에 있는 거지. 토우코는 진술도, 질문도 아닌 듯한 분위기를 머금은 말에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제 몸 앞으로 쏟아진 사람의 무게에 엷은 숨을 들이켰다. 잠에서 막 깨어난 탓인지, 아니면 심중을 잠식한 불안 탓인지 N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때까지도 토우코의 소매 근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몇 번 가늘게 떨었고, 마지막으로는 물기가 배인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


“알다시피 나는 텅 비어 있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물론이며,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던 이들에 대한 것조차도 사실 잘 모르는 채였어.”


무언가를 소중한 것이라 칭할 수 있게 될 때쯤, 그것이 내 곁에서 사라지는 일은 일상처럼 빈번했고…그래서, 어느 날 눈을 뜨면 너조차도 내 곁을 떠나 있을 것 같아 두려웠어. 마치 선잠 속에서의 꿈처럼. 고해성사의 순간과도 같이 저의 앞에서 줄줄이 쏟아진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토우코는, 몇 분 전부터 손에 들고 있던 컵을 N에게 건네었다. 컵의 온기와, 그 속에 든 차가 이따금씩 수면처럼 일렁이는 것을 그저 응시하며 입을 다물고 있던 그는, 돌연 귓전에 닿은 목소리에 놀란 양 눈을 깜박였다. 비어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나는 N의 곁을 떠나지 않아. 그러니 일어나지 않을 일에 슬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게다가, 오히려 그런 걱정을 해야 할 사람은-. 말마디 몇 개를 제가 끊어낸 문장에 덧붙이려던 토우코는, 일순 어떤 감정을 가린 듯한 무표정을 지은 뒤 재차 입을 다물었다.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확신 넘치는 기세로 토우코가 꺼낸 말을 곱씹던 N은, 꽤나 깊게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양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가 돌연 짧고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자신에게 향한 의문의 시선에, 그는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갑자기 미안해. 그냥,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너한테 무언가를 배우기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왜 웃음이 났는지는 아무래도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너 덕분에 나는 확실히 제자리에 존재하고 있어.



지나간 밤 너머에서 여러 색을 머금고 있던 새벽이 모습을 감춘 뒤에도, 비는 그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음량을 가장 작게 설정해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백색소음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저의 옆에서 화면 너머에 시선을 붙이고 있는 N을 사선으로 물끄러미 올려 보던 토우코는, 조금 오래 전의 일을 떠올리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환상에는, 언제나 강렬하면서도 말로는 쉽사리 묘사할 수 없는. 그런 특유의 향이 있었다. 처음 N과 마주했을 때, 토우코는 어째서인지 그의 주변에서 그것이 떠돌고 있다는 듯한 감각을 느꼈고, 혹여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면 그가 사라지고 없을 듯한 기분이 들곤 해 미묘한 불안감을 이따금씩 끌어안고 있었다.



그야말로 독백처럼 불투명하고도 아릿한 것이 허공을 스치고 지나간 듯한 감각에, N은 무언가 말한 것이 있었냐고 되묻는 대신 조용히 토우코를 응시했고, 그녀는 기분 탓이라는 양 희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냥, 우리 둘 다 제대로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기뻐서. 그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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