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사라기 모모는 제 곁에 앉아 땅바닥의 의미 없는 무늬에서 규칙성을 찾기라도 하고 있다는 양 오묘한 무표정을 짓고 있는 이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극히 익숙한 이의, 조금도 익숙하지 않은 복장을 위에서 아래로,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 훑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양 닫혀 있던 제 입을 열었다. 작열하는 더위와 그날따라 유독 바싹 마른 채로 사방을 기어다니던 기류의 감각이 한데 뒤섞여 목구멍 너머로 들어오는 감각은 기괴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쿠로하 선배랑 같이 있으면 항상 선배가 ‘하늘에서 돌연 떨어진 사람’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분명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이질적이어서.


아, 이런 말 하면 실례인가. 희미하게 유감이라는 듯한 기색을 머금은, 혼잣말 엇비슷한 것을 작게 곱씹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모모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던 쿠로하는 이내 무엇인가가 퍽 아니꼽다는 양 코웃음을 치곤 재차 땅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너는 어째 나랑 마주칠 때마다 그 소리 한다.


여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의 성격을 나쁘게 보이도록 만드는 날 선 말투가 모모의 귓전에 닿았다. 그녀는 다시금 찾아온 침묵을 메울 이야깃거리를 머릿속에서 하나씩 떠올리고 지우다 돌연,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난 제 잡념에 휩쓸렸다. 머리 위로 펼쳐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더위에 녹아 그 새파란 쪽빛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모모는 오늘 하루, 저에게 일어났던-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영화의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가듯 그녀의 뇌리에 흑백으로 바랜 현실이 뜨고 가라앉기를 거듭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교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쿠로하 선배와 마주쳤고,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이 난리냐고 선배한테 따지면서 끌려오다시피 걷다 보니 유원지였고, 자신이 와 놓고선 전혀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던 선배랑 한참 놀다가-한숨 돌리자는 생각으로 벤치에 앉았었지.


싱거우리만치 빨리 끝난 회상에 이유 모를 아쉬움을 느끼던 모모가 시선을 돌린 곳은 광장 한가운데에 흉물스럽게 자리한 시계탑이었고, 꽤 긴 시간이 지났을 터라고 예상했던 그녀의 감각과는 달리 시계는 부자연스럽게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보다 이상하네.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맞춰 줄 사람이 절대 아닌데. 갑작스레 수면 위로 떠오른 자신의 생각과 그 사고방식에 그녀는 고개를 외로 꼬았다. 쿠로하와는 분명, 서로가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 비슷한 류의 판단을 정확히 내릴 수 있을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초면이라고도, 친구라고도 칭할 수 없는 그런 애매한 친밀함이었다. 그럼에도 문득 되돌아보면, 모모는 스스로가 놀랄 만큼 스스럼없이 그를 대하고 있었다…라고, 그녀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그런 과거에 쳤던 2점짜리 시험의 답을 떠올릴 때와 미묘하게 닮은 두통에–아마도 자신의 생각을 너무 깊이 파고든 탓이다- 오른쪽 관자놀이를 지긋하게 누르면서 모모는 재차 쿠로하의 방향으로 목을 돌렸고, 순간 언제부터 저를 주시하고 있었는지 모를 차가운 눈동자와 마주했다. 야, 몇 번을 불러야 대답할 거냐?


“-그 말 뒤에 ‘진짜로 죽고 싶어’, 하고 물으실 거죠?”

그저 잡념에 골몰해 있던 자신을 한참이나 부르고 있던 이가 툭 던졌던 평범한 말에, 자기 자신도 놀랄 만큼 적확한 질문을 던져 보인 모모는 미미한 동요의 기색을 보인 쿠로하의 눈동자에 붙들린 채 제 눈꺼풀만을 몇 번 여닫았다. 미적지근한 물에 서서히 잠기는 듯한 공기의 감촉과 떨림을 기점으로 그녀는 아주 느릿하게, 얼마 전 저의 이마 위를 미끄러지던 혈액의 감촉을 상기했다. 수마에 빠져드는 양 뭉개지는 의식 속에서 던졌던 그 순간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담은 저 자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어차피 죽일 거면서 그딴 거, 묻지 마요.



기분 더러우니까.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아세요? 금방이라도 그 새하얗기 그지없는 손으로 눈 앞에 자리한 모모의 목을 조를 양 시선을 부득부득 갈고 있는 이에게 그녀가 가볍게 질문했다. 한 손에 겉치레 겸 쥐고 있던 문고판 책을 내던지듯 벤치 한구석에 놓은 쿠로하는 모모의 코앞까지 기울였던 제 몸을 거두며 혼잣소리를 짓씹었다. 명을 구걸하는 데에도 도가 텄구나, 아주.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쳤다고 제자에게 타박하는 선생의 그것과 같은 기색을 띤 쿠로하의 말을 평소처럼 넘긴 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언덕 너머에서부터 다가오는 짐승의 그림자가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대라는 뜻에서 여명, 또는 황혼을 칭할 때 쓰는 프랑스의 은유적 표현이라는데.”

이런 걸 제가 어떻게 아냐고 물으셔도 별 거 없으니까요. 그냥 오늘 아침 보고 있던 TV 오컬트 코너에서 나왔던 거니까. 이어진 모모의 말에 그런 것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묻는 대신 눈동자의 차가운 빛만을 점차 굳혀 가던 쿠로하 주변의 싸늘한 기류를 느낀 그녀는 다급히 외쳤다. 아, 잠깐. 죽이지 마세요! 마냥 생뚱맞은 이야기 아니니까. 분명히 이 상황과 관계가 있다니까요, 그거.


자신의 기준으로 ‘다짜고짜 저에게 달려들 때’의 쿠로하, ‘무언가를 잘못 먹은 듯 유순하게 저의 여생에 어울려주는-가령 오늘과도 같이- 때’의 쿠로하를 각각 늑대. 그리고 개에 비유해 본 것이라고 솔직히 털어놓는 순간 그가 당장 저의 남은 시간을 손에 움켜 으스러뜨릴지 아닐지를 열심히 가늠하던 모모의 침묵은 그의 짧은 실소와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너는 그런 상황에서 뒤돌아 도망친다는 거냐? 아니면 반대? 자신보다 어린 아이의 유치한 행동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장단을 맞춰주는 사춘기 청소년의 그것을 빼닮은 태도로 던져진 쿠로하의 말이 끝날 무렵 날아든, 모모의 무언가를 체념한 듯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그는 살의가 반, 흥미가 반 섞인 시선을 거듭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썩 나쁘지 않다. 아니, 나아가 유쾌할 지경이라며 그는 속으로 짧게 웃었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거죠. 다가오고 있는 것이 제 목을 물어뜯을 늑대여도, 꼬리를 흔들 개여도 결말은 똑같을 테니까.


* * *


그래서, 모처럼 네 비위를 맞춰 준 산보는 즐거웠던 모양이지? 웃음을 깨물고 있는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쏘아보던 눈짓을 물린 모모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역시 겪어 보니 몇 배는 더 불유쾌하네요.


양 손을 무릎에 올린 채, 가만히 앞을 바라보며 침묵하기 시작한 모모를 의아하게 뜯어보던 쿠로하는 조롱의 기색 하나 없이, 몇 분 전보다 더욱 굳어진 표정으로 말을 내었다. 의외네.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가엾게도. 확신에 가득 찬 말투를 한 그의 태도와 더불어 저를 진심으로 갸륵히 여기고 있는 듯한 시선에 울컥, 하고 미간을 찌푸린 모모는 필시 얼마 남지 않았을 자신의 명을 붙이기를 완전히 포기하며 재차 따지듯 대화를 이었다. 그러는 쿠로하 씨도 매한가지잖아요.


그래, 그건 그렇지. 예상했던 것-무시, 코웃음 또는 조롱-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머금은 쿠로하의 말에 모모는 찰나와 엇비슷한 길이의 숨을 들이켰다.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영겁의 윤회 속에서, 처음으로 그가 자신의 태도를 인정했다는 생각에 그녀는 퍼뜩 정면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보려고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시야는 이미 암흑으로 변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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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22995386



가장 난해한 수식의 시작점은 언제나 너였어. 왜 여태껏 눈치 채지 못한 걸까.


비어 있던 허공을 채웠던 말은 너무도 가늘었기에 곧 사라졌고, 그 독백을 듣지도, 곱씹지도 못한 채 흘려 보낸 토우코는 그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유리창 너머의 풍경만을 바라보았다. 아래에서 위로 몰아치는 바람의 흔적이 이따금씩 근처로 날아들었다. 구름 사이를 드나들며 매 순간 각도를 바꾸던 햇살은 그날따라 유난히 선연하게 개어 있었다. 무슨 말을, 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녀는 사방을 메운 정적을 풀어낼 수 있을 법한 말들을 속에서 거듭 쓰고 지웠다. 침묵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의 감각을 제 눈앞에서 돌연 자아낸 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토우코는 바깥의 풍경을 주시하고 있던 시선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희고 검은 옷자락과 그것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수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흰 팔, 손목과 손. 그녀의 뇌리를 스친 것은 첫눈 같다, 라는 막연하고도 갑작스러운 감상이었다. 그녀는 별다른 의미 없이 허공을 스치고 제자리에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이의 손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멍하니 그 움직임만을 좇았다. 시간의 속도는 유난히 굼떴다.


입 밖으로 내고 싶은 말이 점점 불어난 탓에 도리어 입을 다물고 있던 토우코는 조금씩 제 시선을 위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허공에서 반대편 것과 마주쳤다 느낀 순간 N이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난 탓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 어깨 위에 닿은 타인의 감촉에는 온기가 배어 있었다.


그래, 알 것 같아. 너는 사랑, 그 자체였던 거야.


…너무 갑작스럽잖아. 저에게 던져진 결론에, 짧은 반응 하나를 시작으로 무어라 대꾸를 하려던 토우코는 빤히 내려다보이는 거리에서 반짝이고 있는 N의 눈동자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맑기 그지없어 오히려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그 눈길이 퍽 난처하여 어색한 표정만을 지었다. 그녀가 제 뺨에 오른 열기를 식히려는 양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다가, 문득 이 순간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바란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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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키타 GUGU」 AU




재차 한 번의 계절이 지나, 부쩍 싸늘해진 기류를 등진 채 토우코는 제 손가락을 차례로 꼽아가며 수를 세었다.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자연의 언저리에서 주변의 온갖 풍경과 사람이 바뀌기를 여러 번. 세월은 눈치 채지 못한 새에 먼 길을 떠나 있었다. 수가 예순을 겨우 넘길 때까지 셈을 이어가던 그녀는 거듭 한숨을 쉬다 심드렁한 기색으로 반쯤 풀어져 있던 주먹을 폈다.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감촉이 기묘하게도 낯설었다. 풀잎 흔들리는 소리만이 가득하던 담홍색의 하늘 위를 배회하며, 까마귀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숲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만 했다.





N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미적지근한 바람과 함께 겨울이 물러가기를 마흔 번쯤 반복했던 해부터였다. 저를 데리고 온 세상을 돌아다닐 것만 같던 그의 발걸음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점차 느려졌고, 그것이 끝내 멈추어 좀처럼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을 토우코는 늘 의아하게 생각했다.


짙은 그늘이 진 나무의 밑동에 앉아 고요하게 잠이 든 N을 가만히 지켜보던 토우코는, 그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려 제 엄지와 중지로 만든 고리에 대어 보았다. 예전보다 더 얇아진 듯싶었다. 밝은 하늘에 희미하게 떠 있던 달의 형체는 어느새 선명해져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곁에 자리하고 있던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린 것이었는지, N은 나른하게 눈을 떴다. …좋은 저녁이네, 토우코.


노을도 져버렸으니, 밤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걸.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한 대답에 그저 웃어 보인 N을 물기 어린 시선으로 한참 주시하던 토우코는 제 고개를 아래로 살짝 비틀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N, 예전이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야위었어. 백 년은 한참 전에 끝났는데 왜 나를 먹지 않아?


천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토우코가 꺼낸 마지막 말에, N은 환희와 절망, 아쉬움 같은 감정이 한데 뒤섞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사무치도록 슬퍼 보였기에, 그녀는 다시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하늘 너머로 눈동자를 굴렸다.


“언제부터였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어. 백 년이 지나 너를 먹으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라고…너희가 말하는 ‘정’이라는 게 심장 근처에 꽉 들어찬 것 같아서, 너를 잃는 것도, 시간이 가는 것도 두려워진 거야.”


그렇다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건 이상해. 먼 옛날에는 다른 사람들을 먹으면서 살아 왔다고 했잖아. 토우코의 목소리는, 허공으로 빠져 나온 말이 끝을 향할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그녀의 기색을 가만히 살피던 N은,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전, 그녀가 날 선 눈초리로 저를 적대시했던 기억을 떠올려 소성(笑聲)을 내었다. 그냥, 온 세상에 전부 네가 있어서. 도저히 먹을 기분이 나지 않았어. 돌연 그가 낸 말에, 토우코는 도통 의미를 모르겠다는 양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여태까지 네가 나에게 보여줬던 감정이나 웃음, 발걸음, 태도나 말...그것들의 파편을 모든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든 갖고 있었어. 세상 모든 것이 토우코를 닮아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진 거야.”


“…N은 사람이 죽는 순간에 하는 마지막 말이나 그 목소리를 먹는다고 했지. 궁금하지 않아? 백 년을 채운 인간의 맛은 산해진미가 따로 없을 정도라고, 직접 그렇게 말했잖아.”


"고작 맛에 대한 호기심 따위로 내가 어떻게 토우코를, 그 목소리를 먹을 수 있겠어.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너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허기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도 오래 전부터였어, 정말이야."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미세한 두통 탓에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머리칼 사이를 조금씩 헤집던 N은, 재차 희미한 숨을 쉬다가 깊은 수마 너머로 빠져갔다. 벌판에 남은 것이라고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래서는, 정말 인간보다 더 인간 같게 되어버리잖아. 막 허공으로 나오려던 마지막 말을 혀끝에서 도로 삼킨 토우코는, 미동조차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마찬가지로 함께 있고 싶은 나는 무엇을 하면 좋으냐고 물으려던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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